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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인생의 막이 올랐습니다.씨리얼 2020. 12. 16. 11:45
2020년은 모두에게 잔인한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하고 무너졌다. 누군가는 직장을 잃고, 또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소름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2020년을 되돌아보니, 그래도 잘한 일들이 있기에 씨리얼 노트를 작성해본다.
나는 작년까지, 31년동안 대체가능한 인물의 결정체였다. 물론 삶을 사는동안 열심히도 살았고 나태하게도 살았다. 남들처럼 살았다. 그래서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필요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으로 열심히 성장해왔다. 초중고를 거쳐 평범한(아니 조금 뒤떨어지는) 대학에 갔고, 교환학생 시절과 복수전공을 거쳐 빡센 대학생활을 했다. 졸업 후 무작정 서울행, 그렇게 5년 남짓 직장생활을 했고, 고향이 그리워 또다시 무작정 백수로 부산에 돌아왔다. 그렇게 다시 작은 회사에 다니며 삶을 꾸려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을 배우고 익혀가며, 사명감이나 책임감보다는 하루하루를 버텨내는데 급급했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났다, 2019년에. 별다를 것 없는 회사생활에 지쳐, 탈출구로 선택했던 컨텍스트라는 독서모임에서 만난, 잘 모르는 이 남자와 덜컥 연애를 시작했다.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건 그 남자의 자신감과 열정이 부러워서였다. 그는 연애를 시작하고서 대뜸 공부를 하라고 했다. 대학원에 가서 더 많은 걸 배우고, 나만의 길을 찾으라 했다. 그렇게 연애 3개월을 막 넘겼을 때, 나는 정말 대학원에 갔다. 그게 2020년 2월의 결정이었고 지난 1년을 되돌아 봤을 때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이 되었다. 그렇게 두번째 인생의 막이 올랐다.
쉽지 않았다. 7시 퇴근인 회사에서 대학원 생활을 병행하려면 제일 먼저 퇴근 시간 조율이 필요했다. 입학원서부터 덜컥 내놓고 회사에 양해를 구했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6시에 퇴근을 하고 부리나케 대학원 수업을 다녔다.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강의를 한참이나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1년 2학기가 끝이 났다. 신체구조를 뜯어보고 뇌와 뇌신경을 조목조목 외워가며 공부할 날이 올거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살고 있다.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하고,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라고 말했던 그 남자와 결혼을 한다, 아니 결혼을 했다가 맞는 말일까. 우리는 21년 1월, 결혼식만을 남겨두고 있다. 9월 말 퇴사를 확정지어두고, 8월 말 신혼살림을 차렸다.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각자의 자취생활을 정리했고, 상견례를 치르기 전에 이미 결혼을 확정지었다. 함께 살면서 연애 1주년을 맞이했다. 아침에 눈뜨고 보고, 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보는 삶이 설레임이나 두근거리보다는 화내고 짜증내는 순간들이 더 많다는 것을 실감하며 4개월째 살고 있다. 그러나 연애 때 느꼈던 불안함과 초조함, 걱정들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안정적이며 함께 그리는 미래가 풍요롭다. 화 내고 싸우는 순간은 금세 지나가버리고, 언제 그랬냐는듯 서로를 챙기고 배려하는 순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20년에서 코로나를 뺀다면,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여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고 꿈이 생겼다. 나를 괴롭게 하던 회사 생활을 끝냈으며, 부모님과 내동생이 아닌 새로운 가족들이 생겼다. 절대적인 내 편을 만났고, 그 덕분에 아가씨가 아닌 아줌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올해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인지, 딱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더이상 대체가능한 사람으로 사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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